Ⅰ. 고려시대의 왕
1. 태조왕건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 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
왕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왔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북쪽의 변경(邊境)을 수비하겠다는 그의 약속에 따라 그에게 그 지방을 봉하여 주었다. 위만은 북방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안 유이민 집단의 세력을 키워서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지방의 지배자가
고려는 원의 요구에 따르거나, 아니면 무한히 고통을 참는 길밖에 없었다.
고려의 정복지는 모두 원의 일부로 복속시켰지만, 세조 쿠빌라이는 온건책을 채택하여 고려의 국체를 온존시켰으나 자비령 이북의 영토는 몽고에 복속되었다. 또한 원은 국왕 임명권, 정동행성의 설치, 친원 집단의 조성을
(1)원의 간섭과 사대부의 성장
원 간섭하의 개혁과 반발
1259년 몽고와의 전쟁을 끝내고 1270년 무신정권이 타도되고 왕정이 회복됨으로써 고려사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고려왕[원종]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세자인 충렬왕의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그후에도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
왕의 운신(運身, 어떤 일이나 행동을 편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함)의 폭을 넓히고, 허설(虛設)된 아문들을 통합함으로써 업무처리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기강정비에 있어서는 충선왕 자신의 고려 내에서의 입지 강화 및 조정 내 기강 단속을 위해 귀족 가문과의 통혼 및 감찰행정을 강화하였
왕도정치를 꿈꾸며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등의 온건개혁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지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우왕 14년 5월 이성계에 의해 단행된 위화도 회군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이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게 된 것은 현실적인 대응방식의 이견에서 왔습니다. 즉 고려말의 신민으로서 고려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대의 명분으로 고려를 중흥시키고 개혁을
창왕 즉위년 (1388년) 10월 어느날 - 토지개혁을 둘러싼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의 대립 오늘 퇴궐하던 길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스승님(목은 牧隱 이색 李穡) 댁에 들러 식사를 했다. 얼마 전에 명나라에 위화도 회군과 우왕 폐위 그리고 창왕 즉위에 관한 우리나라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Ⅰ. 머리말
원나라에 의한 충혜왕의 죽음으로 국왕이 된 충목왕은 전대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기존의 정치운영에 반발하는 관료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해야 했으며, 원나라의 영향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목왕 초기부터 성리학이 사상적으로 크게 보급됨으